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머니도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는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머니를 만났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울에서 나를 낳고 길렀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쭉 서울에서 살았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에 인천에서 잠깐 살았던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대학교도 서울에서 졸업하고 취직도 서울에서 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쭉 서울에서 일하며 살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서른 중반을 넘어 이직한 회사의 주소지가 하필 경기도였다. 나는 첫 출근을 하던 날의 공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월요일 아침에 서울의 끄트머리에서 한강을 가로질러 경기도까지 내려가야 했으니! 게다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전철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버스를 타야 했다. 나는 버스와 전철을 세 번씩 갈아타며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서서 가느라 허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우리 집은 좀처럼 아파트값이 오르지 않는 서울의 변두리에 있었다. 빈손으로 시작하여 외벌이로 힘겹게 네 가족을 일궈내신 아버지가 가까스로 분양받은, 처음으로 장만한 우리 집이자 신축 아파트였다. 하지만 말이 좋아 서울이지 강남이나 종로 같은 중심가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게다가 아파트라고는 해도 고작 두 동이 동그마니 서 있을 뿐 심지어 근처에는 그 흔한 구멍가게 하나 없어서, 급작스레 간장이라도 떨어진 날이면 어머니는 팔 차선 위의 육교를 가로질러 옆 동네까지 뛰어가야 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모두 그 아파트를 사랑했다. 처음 이삿짐을 내리던 날, 모든 구석구석이 찬란하게 새것인 신축 아파트에 나는 크게 감동했다. 하다못해 가스레인지 위에 붙어있는 작은 라디오조차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부모님은 조금 무리하여 가구의 대부분을 새것으로 들였고, 덕분에 거실에는 우리 집 역사상 처음으로 소파가 놓였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집에 수리기사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별 뜻 없이 던졌을 법한 “집이 좋네요”라는 칭찬에 어머니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아파트 옆에는 작은 천을 따라 산책로가 나 있어서 어머니와 나는 곧잘 저녁 산책을 했다. 봄이면 아직 덜 자란 벚나무가 비록 듬성듬성하나마 벚꽃을 피워냈다. 여름에는 들장미와 해바라기가,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그 작은 산책로를 따라 피어났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우리는 그 집을 사랑하며 이십 년이 넘게 살았다. 매물로 나온 집을 보려고 방문한 신혼부부는 오래된 집치고 너무 깨끗하다며 바로 계약하고 싶어 했다. 그만큼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신들의 첫 집이자 첫 아파트를 쓸고 또 닦아댔다.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에는 역시 서울 변두리의 4층짜리 낡은 빌라에 세 들어 살았다. 국민학교(나 때에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불렀다) 시절, 반 아이들은 그 빌라가 있던 동네에 사는 친구들을 가리켜 ‘xxx(동네 이름) 아이들’이라고 구별하여 불렀다. 그 ‘xxx 아이들’이란 으레 생일잔치에 초대될 확률이 낮거나, 편을 갈라 피구 시합을 할 때 마지막까지 선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누가 xxx에 살고 누가 조금 더 좋은 동네에 사는지 구별하기란 쉬웠다. 어느 길목에 이르러 갈림길의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아이들이 “xxx 아이들”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국민학교를 졸업한 지 삼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나는 그 갈림길에 대한 꿈을 자주 꾼다. 모두 같이 우르르 하교하다가 갈림길에 이르면 어느새 친한 친구들은 죄다 사라지고 나 혼자만 남는 꿈이다. 또는 생전 처음 보는 무표정한 아이들과 함께 그 길을 내려가는 꿈이다.
  그런데도 그 동네의 낡은 빌라에 전세 들어 살던 나의 청소년기는 유독 반짝반짝하고 행복했던 순간들로 가득하다. 유난히 손이 크고 인정 많은 옆집 아주머니가 김치전을 부치는 날이면 빌라에 사는 모든 집에서 구수한 김치전 냄새가 풍겨 나왔다. 위층의 명랑한 아주머니네에는 꼬맹이 둘이 있었는데, 나는 주말이면 자진하여 그 꼬맹이들의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놀았다.
  어느 해인가의 유독 더웠던 여름날, 당연한 듯 에어컨이 없었던 빌라의 어머니들은 옥상에 함께 돗자리를 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방학 내내 우리는 다 같이 옥상에서 저녁을 먹었다. 어느 날은 한 집에서 밥을 볶았고 어느 날은 다른 집에서 짜장면을 만들었다. 삼겹살을 구운 날이야 훨씬 더 많았다. 저녁을 다 먹고 나면 아이들은 돗자리 위에서 상을 펴고 공부를 했다. 어머니들은 과일을 깎으며, 남편에게 매를 맞다가 벌거벗은 채로 뛰쳐나온 앞집 아주머니와 결혼한 지 십 년이 지나도록 애가 없던 문방구 집의 착하디착한 부부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코끝으로 알싸한 모기향 냄새를 맡으며 돗자리 위에서 하는 공부는 제법 효과적이었고, 덕분에 나는 생일잔치에서 제외되거나 피구 시합에서 선택받지 못 하는 일은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늘 김치전을 나눠주던 옆집 아주머니의 아들이 학급 임원이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경기도에 위치한 회사로 이직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나는 결혼을 했고, 그와 동시에 난생처음 경기도에서 살게 되었다. 내 인생에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두 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난 셈이다. 하지만 결혼하고도 처음 얼마간은 집과 동네에 정을 붙이지 못해 주말이면 자꾸 친정이 있는 서울로 도망갔다. 대형 마트와 전철역이 가깝고 출퇴근이 용이한 신혼집보다는, 황량한 도로변에 서 있고 부모님 손때가 가득한 서울 변두리의 아파트가 진짜 우리 집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은 이십 년이 넘게 살던 서울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경기도로 내려왔다. 그래서 지금 나는 친정 부모님과 같은 아파트의 옆 동에 살며, 서울은 일 년에 채 몇 번도 가지 않는다.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의 산란이 서울과 비교도 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척에 계신 친정 부모님 덕분일까. 아무튼 나는 이제 확실히 경기도에 살고 있다.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나의 고향 서울은 이제 지나간 옛 연인처럼 아리게 맺혀 있을 뿐이다.
  이직한 회사에서 회식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와 여러모로 맞지 않는 상사는 ‘임대 아파트 아이들’과 자신의 자녀가 같은 초등학교를 배정받는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맙소사, 그놈의 ‘xxx 아이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모두의 얼굴을 골고루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는 듯한 상사의 표정에서 나는 갈림길의 위쪽에 서 있던 이십 년 전 반 아이의 표정을 보았다. 아마도 갈림길의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아이를 생일파티에서 제외하고 싶었을 것이다. 피구 시합에서 같은 편에 넣어주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료들이 모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상사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바람에 나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와 핸드백 속을 뒤졌다. 전부터 굴러다니던 반창고가 하나쯤은 있을 터였다.

  이것저것 쑤셔 넣기만 한 낡아 빠진 핸드백 안은 제이슨의 집과 다름없는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이래 봬도 중고로 다 팔아치우고 남은 유일한 명품 핸드백이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에게 새로운 핸드백 하나 정도는 사줄 만도 하거늘 제이슨은 도통 그런 쪽으로는 눈치가 없었다. 뭐, 괜찮다. 어차피 이 넓기만 한 낡은 저택도 구닥다리 명품 핸드백도 모두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만이니까.

  제이슨 엘에이와 뉴욕에서 모종의 투자 컨설팅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한 달에 일주일쯤은 미국에서, 나머지는 한국에서 지냈다. 잘은 모르지만 투자 컨설팅이라는 일은 굳이 현장에 있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었다. 둘이 함께 보내는 밤이면 제이슨은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엘에이의 태양이 얼마나 강렬한지, 뉴욕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에 대해 디테일만 바꾸어 거듭 들려주었다. 미국이라면 몇 년 전 친구들과 괌으로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것이 전부인 내게 그의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도통 질리지가 않았다.

  "엘에이에서 살려면 선글라스가 필수야. 태양빛이 너무 강렬해서 눈에 좋지 않거든. 아, 유니만의 자동차도 필요할 거야. 빨간 스포츠카면 될까?"

  "뉴욕의 겨울을 정말 길고 추워. 하지만 모두 멋쟁이들 뿐이라 유니가 한국에서 입던 롱 패딩 같은 건 절대 안 돼. 뉴욕에 도착하면 우선 백화점에서 쇼핑부터 하자."

 

 

  “세상에, 무슨 열쇠가 이렇게나 많아?”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어느새 방까지 따라 들어온 윤실이 언니가 핸드백 안에서 제이슨이 건넨 열쇠 꾸러미를 쏙 빼내어 '짤랑짤랑' 하고 흔들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열쇠 꾸러미를 도로 낚아채 다시 핸드백 속에 넣었다. 아무래도 열쇠에 언니의 손에서 흐르던 피가 묻은 것 같아 찝찝했다. 하지만 언니는 개의치 않고 내게 바짝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었어? 채린이가 네 남자 친구를 안대." 
  “채린이가 제이슨을 어떻게 알아?” 

  나는 조금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윤실이 언니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언니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어떻게 알긴? 뻔하지 뭐. 너도 알잖아, 걔들이 어떻게 노는지.”

 

 

  윤실이 언니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나는 결국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애당초 '흙탕물 게임'을 알려준 사람은 윤실이 언니였다. '흙탕물 게임'이란, 커플 사이에 일종의 막대기를 넣고 한 번 휘저어 보는 장난이다.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더러운 것이 떠올라 한바탕 흙탕물이 일면, 아무리 사이가 좋은 커플일지라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윤실이 언니가 이번에도 '흙탕물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표정 아래 은밀히 웃고 있는 듯하던 입꼬리가 생각할수록 역겨웠다. 설상가상으로 제이슨으로부터 벌써 사흘 째 아무 연락이 없었다. 초조해져 견딜 수 없어진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핸드백 속을 정신없이 뒤졌다. 

<계속>

'어른들을 위한 무서운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른 문의 지하실 (1)  (0) 2020.07.04

  먼 옛날 푸른 수염을 가진 귀족이 있었다. 그는 무려 여섯 번이나 결혼했지만, 그의 아내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었다. 이웃 마을의 막내딸 카트린느는 그와 결혼하여 일곱 번째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티포주 성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푸른 수염은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카트린느에게 성 안 모든 방의 열쇠를 맡기며, 복도 끝의 작은 방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남편이 없는 동안 너무 심심했던 카트린느는 그만 금지된 방의 문을 열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곳에는......

  -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의 <푸른 수염> 중에서

  역시 지하실이 마음에 걸린다.

  제이슨은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에 가지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내게 주며, 집 안의 다른 방들은 모두 괜찮지만 지하실만은 '가급적'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 아닌 경고를 했다. "혹시 시체라도 숨긴 거야?" 라며 농담처럼 되묻자 제이슨은 미국인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로 웃어넘겼다.

  "아쉽게도 시체 따위는 없어. 사실은 곰팡이가 좀 심하게 피어 있거든. 기관지가 좋지 않은 너의 건강을 염려해서 들어가지 말라는 것뿐이야, 유니."

  제이슨은 내 이름을 항상 '유니'라고 잘못 불렀다. 재미교포 2세인 제이슨에게 '윤희'라는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기가 아무래도 좀 어려운가 보다. 아무리 한국말이 서툴더라도 이름만큼은 제대로 불러주기를 바랐으나, 내가 그런 눈치라도 보일라치면 제이슨은 "중요한 것은 내가 유니를 사랑한다는 사실이야"라며 손쉽게 상황을 모면했다. 그렇게까지 로맨틱하게 말한다면 정말 어쩔 수 없다. 그리하여 한국말이 서툰 남자와 영어가 서툰 여자는 서로에게 깊지도 얕지도 않은 상태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적어도 남들 눈에는 그럴싸하게 사랑을 속삭였다.

  "유니, 이번 미국 출장은 좀 길어질 것 같아."
  "얼마나? 언제 돌아오는데?"
  "다음 달 말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걱정 마, 스카이프로 매일 전화할게."

"중요한 것은 내가 유니를 사랑한다는 사실이야."

  제이슨은 비교적 한적한 교외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었다. 서울에서 마땅한 직업 없이 친구 집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던 내가 우연히 제이슨을 만나 그의 집에 눌러앉은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심 부러웠던지 드디어 윤희 네가 잘난 인물값을 하게 되었다며, 이번에 잡은 봉은 꼭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얄미운 덕담을 마음껏 퍼부어댔다.

   그런데 아무리 외곽이라고는 해도 방이 다섯 개나 되는 제이슨의 이층 집은 혼자 살기에 지나칠 정도로 컸다. 심지어 각 방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짐들이 한 보따리씩 쌓여 있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푸른 문으로 굳게 잠긴 지하실이었다. 방 다섯 개를 어느 정도 채우고도 모자랐는지, 본래 주차장이던 지하실을 제이슨은 창고로 개조하여 커다란 문까지 달아 두었다. 마치 자신의 옹졸한 성(城)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외로운 왕자님처럼.

  하지만 어찌되었건 제이슨은 나에게 있어 백마를 타고 온 왕자님이다. 이 김윤희가 화려한 외모로 남자들의 순정을 독차지하던 것도 이미 지나간 한 시절, 어느덧 변변한 직업 하나 없는 삼십 대를 맞이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던 차였다. 주변에서 벌 떼처럼 들끓던 남자들은 나에 비해 외모는 좀 떨어지지만 어느 정도 현실적인 조건을 갖춘 여자들을 만나 어느새 하나 둘 사라지고 없었다. 그중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이 돈도 나이도 많던 어느 변리사였는데, 그 머저리 같은 놈은 내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전화번호까지 바꾸고 잠수를 타버리는 게 아닌가.

  눈물과 키스가 범벅되어 제이슨을 뉴욕으로 떠나보내던 날 저녁, 나는 결국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가든파티를 열어 친구들을 초대했다. 왕자님의 성을 언제 구경시켜주느냐며 진작부터 성화에 시달렸던 터였다. 우아한 미국식 바비큐를 계획했으나, 친구들은 저마다 술에 환장한 듯 맥주며 소주며 보드카 따위를 한 다발씩 사들고 와서는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세상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정말 절로 한숨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그러다가 기어이 술 병 하나를 와장창 깨뜨리고 말았는데, 술에 취한 윤실이 언니가 깨진 술 병 조각에 그만 손을 베이고 말았다.

  "이런 썅! 윤희야, 반창고 없어?"

술에 취한 윤실이 언니가 깨진 술 병 조각에 그만 손을 베이고 말았다. 

  나이를 먹고 입이 한결 더 거칠어진 윤실이 언니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썅', '시부럴' 같은 욕을 중얼거리며 손에서 흐르는 피를 하얀 테이블보에 아무렇게나 슥슥 닦았다. 나는 질려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비상약을 찾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애초에 저 년들을 이 집구석에 불러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이제 곧 제이슨과 결혼하여 엘에이, 또는 뉴욕 같이 번듯한 곳에 미국식 신혼집을 차릴지도 모를 일이니, 아무래도 저급한 친구들은 결혼식을 끝으로 바이 바이 해야지 싶었다. 아니, 결혼식에 부르는 것도 안 될 말이다. 윤실이 언니뿐이랴, 좋다고 소주병 나발을 불고 있는 선영이며 봐줄 남자도 없는데 반쯤 헐벗고 춤을 추고 있는 채린이 등등. 다들 정말 격이 맞지 않는다. 게다가 장담하건대, 제이슨의 친구 중 누구 하나라도 건지려고 온갖 추접스러운 짓을 다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계속>

'어른들을 위한 무서운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른 문의 지하실 (2)  (0) 2020.07.10

  조심스럽게 밀봉되어 있던 커피 원두가 담긴 봉투를 열면 훅 하고 밀려오는 커피 향에 발가락 끝까지 짜릿하다.

  커다란 나무 스푼을 다글다글한 원두 틈 속에 밀어 넣고 저으면 그 소리가 ‘스윽스윽’ 하기도 하고 ‘달그락달그락’ 하기도 한다. 스푼 가득히 들어 올린 원두는 다시 수동 커피 원두 분쇄기의 작은 상자 속으로 쏟는다. 같은 동작을 몇 차례 반복하여 작은 상자 속을 최대한 가득 채운다. 그리고 분쇄기의 뚜껑을 닫고 천천히 손잡이를 돌린다.

  ‘드르륵드르륵’ 하고 커피 원두가 부서지며 뿜어내는 향은 원두 그 자체로서의 향보다 한 층 더 깊다. 나는 복식호흡을 하듯 크게 숨을 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며, 아무 생각 없이 분쇄기의 손잡이를 한 방향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창문 앞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하는 가벼운 노동과 그 여백 속으로 녹아드는 진한 커피 향. 전 날 흑백으로 잠들었던 나를 총 천연색으로 다시 살려내는 커피 원두 분쇄의 마법.

  이왕이면 그릇장의 맨 윗 칸에 모셔만 두었던 파스텔 빛깔의 올록볼록한 커피잔을 꺼내본다. 또는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의 해외 지점에서 공수해 온, 여봐란 듯 전시해두기만 했던 지역 한정판 머그잔도 좋다. 참, 그전에 전기 포트에 생수를 붓고 물을 끓인다. 밥을 짓거나 육수를 내기 위하여 끓이는 물은 수돗물을 사용하는 것이 우리 집의 룰이지만, 커피만큼은 반드시 생수를 끓여 사용하는 것 또한 룰이다. 일말의 부정함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신성한 의식이랄까.

  생수가 전기 포트 안에서 바글바글 끓기 시작한다.

  커피 필터를 한 장 꺼내어 봉합된 모서리 두 곳을 손 끝으로 반듯하게 접은 후에 드리퍼 안에 끼운다. 잔 위에 필터를 끼운 드리퍼를 올리고 나면 비로소 곱게 갈린 커피 가루를 분쇄기에서 꺼낼 차례다. 먼저 잔과 드리퍼를 따뜻한에 물로 한 번 데우는 것이 좋다고도 하던데, 나는 별 이유 없이 이 과정을 생략해버린다.

  질 좋은 배양토 같은 커피 가루가 드리퍼 안의 필터 위로 소복하게 쌓인다. 손바닥으로 그 옆을 가볍게 탁탁 치면 표면이 지평선처럼 반듯해진다. 막 끓인 생수는 주둥이가 백조처럼 길고 우아하게 휘어진 드립 포트로 이미 옮겨 두었다. 그리고 드리퍼의 약 한 뼘 위에서 시작되는 뜨거운 낙수. 봉긋하게 부풀어 오르는 커피 원두 빵과 본격적으로 온 집 안을 휘젓기 시작하는 진한 커피 향.

  이제 곧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완성될 것이다.


  커피를 처음 마시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 때이다. 기말고사가 시작된 초여름, 밤늦게 도서관에 남아 공부를 하다가 지치고 졸리면 건물 끝의 자판기에서 달콤한 믹스 커피를 뽑아 마셨다. 커피 자판기 옆의 스탠리스 쓰레기 통에는 지저분한 담배꽁초가 수북이 처박혀 있었다. 그 옆에 탑처럼 쌓아 올린 종이컵 안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휴게실에서 곧 잘 마주치던 고학번 선배들은 내가 일 년의 휴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마주쳤다. 그래서 시간은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흐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직원이 채 열 명도 되지 않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직접 맥심 커피를 타서 마셨다. 사장님, 부장님, 차장님, 과장님, 대리님의 순으로 타 드린 후에 내 것과 경리 언니의 것을 탔다. 다 마시고 나면 컵을 닦았다. 역시 사장님, 부장님, 차장님, 과장님, 대리님의 컵과 함께 내 컵과 경리 언니의 컵을 닦았다. 중요한 손님이 오시면 철제 캐비닛 안에서 꽃무늬가 그려진 커피잔과 받침을 꺼내어 똑같은 맥심 커피를 타서 드렸다. 한 번은 손님의 방문이 길어져서 꽃무늬 커피잔을 닦지 않고 먼저 퇴근했는데, 그 일로 다음날 사장님께 심한 꾸중을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귀한 꽃무늬 커피잔을 사장님 이하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와장창 소리가 나도록 개수대에 던져 넣은 것은 엄연히 내 잘못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건방진 사건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나는 결국 입사 팔 개월 만에  회사에서 잘렸다. 이제는 어느 회사를 가도 맏언니 뻘이 되어 버린 내가 어린 동료들에게 들려주는 ‘나 때에는 말이야’ 시리즈 중 가장 인기 있는 에피소드이다.   

  세 번째 회사에서 드디어 첫 승진을 했을 무렵부터는 카페라테를 즐겨 마셨다. 카페라테를 내게 처음 권했던 팀장님은 항상 출근길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 와서 오전 내내 마셨다. 그리고 다 마신 일회용 컵은 모니터의 왼편에 쌓아 두었다. 두어 달쯤 지나면 그렇게 쌓인 컵이 첨탑을 이루어 천장에 닿을 듯 말 듯했다. 그러면 팀장님은 첨탑을 무너뜨려 종이백에 쓸어 담아 가지고 나가서는 몇 천 원인가로 바꿔오셨다. (그 당시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에서는 다 마신 일회용 컵을 가지고 오면 오십 원을 반환해주었다.) 그리고 비워진 팀장님의 모니터 왼편에는 바로 이튿날부터 다시 새로운 첨탑이 쌓이기 시작했다.

  팀장님은 회사의 그 누구와도 친하지 않았고, 나 역시 직속 상사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팀장님을 살살 피했다. 그래서인지 팀장님이 회사를 떠난 뒤의 소식은 지금까지도 들리지 않는다. 이 사람 저 사람 사정없이 들이밀며 친구 맺기를 강권하는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에서조차 찾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나와 팀장님 사이에 남아있는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가끔 커피 전문점에서 카페라테를 주문할 때면 자연스럽게 팀장님이 떠오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고작 갓 서른을 넘겼을 뿐이었던, 역시 한 참 어리고 나만큼이나 사회생활에 서툴렀던 그 언니.


  카페라테에서 아메리카노로 취향이 변하게 된 계기는 기억하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취향의 변화와 함께 나이를 제법 먹었다는 것, 그리고 그만큼 사회생활에 많이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대리’라는 첫 직함을 달기까지 회사를 세 번이나 옮기며 어렵사리 어른이 되었던 나는 당초 주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 아니, 잘 다녔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나는 다시 한번 사표를 던지고 빠르게 증가하는 사십 대의 실직자 무리에 스스로 뛰어들었으니까.

  자판기 커피와 맥심 커피는 달콤하다. 카페라테는 우유가 주는 풍미로 부드럽다. 반면 아메리카노는 달콤하지도 부드럽지도 않고...... 씁쓸하다. 그래서 아메리카노를 들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은 순전히 멋으로 그런 줄 알았고, 아마 나 역시 멋으로 마시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원두의 산지와 로스팅 정도를 따지고 직접 핸드드립을 할 정도로 빠져버렸으니, 사람 일이란 참 알 수가 없다.

  솜씨 좋게 내려진 커피가 예쁜 잔 안에 가득하다.

  나는 이 커피 잔을 고상하게 받쳐 들고 식탁 위에 앉아 노트북을 켤 것이다. 이력서를 올려둔 몇몇 구직 사이트를 한 번 둘러보고, 정중한 채용 탈락 이메일도 확인할 것이다. 지난번에 점찍어둔 채용 전형이 아직 유효한지도 확인해보고, 조건만 맞다면 얼마 남지 않은 용기를 끌어모아 다시 한번 지원해 볼 것이다.

  비록 씁쓸하지만 따뜻하고 향긋한 핸드드립 커피 두어 모금이면 오늘 하루도 그럭저럭 이겨내 질 것이다.

'지극히 사소한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는 서울에 살지 않는다  (0) 2020.07.17

+ Recent posts